내 생애 첫 차를 뽑았다.
출퇴근용으로 오토바이를 산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차’를 산 건 처음이다.
그것도 중고가 아니라,
적당히 저렴하게 나온 경차를 새 차로.
마흔이 되어서야, 첫 차라니.
또래들과 비교하면 많이 늦었고,
어쩌면 좀 애처로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열매가 익는 순간은 과일마다 다른 법이다.
성장촉진제를 발라가며
남들이 정해놓은 시기에 맞추고 싶지 않았다.
번외지만, 그래서
명절 선물세트에 나오는 큼직한 과일은
당도는 떨어진다는 말도 있다.
제 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제 철이 아니다.
원주에 처음 왔을 때,
이삿짐 트럭에 오토바이를 함께 실어왔다.
당연히 출근용이었다.
그때는 직장도 구해져 있었고,
새로운 출발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2020년 9월 23일.
출근길이었다.
직진 신호를 받아 달리던 중,
반대편 차선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던 차량이
내 오토바이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내 무릎이, 그대로 차에 찍혔다.
충돌 순간,
“아… 크게 다쳤다”는 걸 직감했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갔다.
CT를 찍더니 의외로 금세 퇴원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단순 타박상이라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그런데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의 통증이 이상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CT와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본 결과,
왼쪽 무릎과 오른쪽 발가락에 골절이 있었다.
그때의 병원 처치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행히 두 번째 병원의 주치의는
더 정밀히 지켜보자고 했다.
수술 여부를 다음 날 결정하자고 했는데,
운 좋게도 애매한 위치여서
재활 치료로 가능하겠다고 판단해주셨다.
입원을 했지만,
나는 1주일 만에 퇴원했다.
몸은 아직 멀쩡하지 않았지만
“직장을 지켜야 한다”는 간절함이 더 컸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
회사의 대표는 내게
“이제 함께하기 어렵겠다”는 말을 전했다.
“예전 같은 간절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 후에도
회사의 직원 몇 명은 혼자 있는 나를 찾아와
밥을 함께 먹고, 시간을 내어주곤 했다.
연고도 없는 원주에서
다친 몸으로 지내는 내가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던 거겠지.
진단서의 전치 기간은 8주였지만,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재활치료는 물론,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한의원까지 병행했다.
병원을 드나든 시간만 6개월.
그리고 사고의 과실 비율은 9:1.
그 1이 억울해서
합의는 1년 넘게 이어졌다.
내가 다시 직장을 온전히 다닐 수 있게 된 건
사고 후 1년 4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 무릎이 남긴 보상으로,
나는 내 인생 첫 차를 사게 됐다.
이 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다.
그건 내가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게 된 상징이다.
부서졌던 무릎, 놓쳐버린 시간,
그리고 끝내 지켜지지 않았던 직장.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합의금이
나에게 ‘이동’이 아닌 ‘회복’을 선물해줬다.
늦어도 괜찮다.내가 도착해야 할 곳은, 아직 열리지 않은 제 철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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