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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경제

무게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왕관을 흠집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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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현대제철 노조의 파업 이야기를 썼었다. 임금과 복지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결국 생산 중단이라는 강경한 방식으로 이어졌고, 여전히 노사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정반대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함께 대규모 투자를 공식화한 것이다. 언뜻 보면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하나의 줄기로 이어지는 시대의 흐름이 보인다.

 

 

관세장벽의 허무는 '선제적 투자'

 

정의선 회장의 미국 방문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2기 출범 이후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제조업 부활을 내세우는 시점에서, 현대차그룹은 정확히 그 ‘정치적 수요’에 응답한 것이다. 관세장벽이 높아질 것이란 우려가 퍼지는 가운데, 그는 정면돌파 전략을 택했다. 미국 내 전기차 생산라인 확대, 배터리 관련 신규 고용 계획 등은 단순한 '사업 확장' 그 이상이다. 국가 간 경제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무대 위에서, 현대차는 자신의 승리공식을 ‘선제적 투자’로 정의하고 나선 것이다.

반면, 현대제철은 현재와 싸우고 있다. 글로벌 철강 수요가 정점을 찍은 이후, 각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무역장벽을 강화하고 있다. 이미 중국, 인도, 동남아 국가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저탄소 규제까지 겹치며 철강산업은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 파업이라니. 생산 중단은 투자 위축으로 이어지고, 결국 국내 생산기지의 매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기업은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고, 지속 가능한 사업 구조 없이는 어떤 권리도 지켜질 수 없다. 요구의 강도가 세질수록 기업은 해외로 눈을 돌린다. '국내 고정비 부담'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이 또한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승리공식 중 하나다. 그렇게 선택지는 점점 줄어든다.

재계 일각에서는 국내 현대제철의 비중이 앞으로 점점 축소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현대차그룹은 철강 사업보다 모빌리티, 반도체, 배터리와 같은 신사업 영역에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 왔다. 이는 단순한 투자 방향 전환이 아니라, '미래가 있는 산업'에 리소스를 집중하는 구조 재편의 일환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현재의 파업은 오히려 더 빠른 탈출 신호가 될 수도 있다. 시장의 반응은 빠르다. 미국 내 전기차 라인 확장 소식에 현대차 주가는 반등했고, 각종 경제지에서는 ‘정의선 리더십’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현대차에 세제 혜택을 검토하고 있으며, 노동시장은 현대차의 고용 창출 계획에 긍정적이다. 반대로 현대제철 파업에 대해서는 ‘협상 실패’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고, 산업부와 무역협회는 수출 차질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이 두 가지 시나리오는 같은 그룹, 같은 시대, 같은 위기 속에서 태어난 전혀 다른 결과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을 결정짓는 건 단 하나, 바로 ‘태도’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는 태도, 견디며 나아가려는 태도,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기업 리더가 가져야 할 무게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를 멈추고, 누군가는 전체 산업의 흐름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며 투자한다. 그리고 역사는 늘 그런 선택의 무게를 기억한다.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처럼 말이다. 견딜 수 없는 자들이 왕관을 흠집 내는 순간, 모두가 그 대가를 나눠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권리인가, 아니면 미래인가?"

 

정의선 회장의 선택이 반드시 정답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시장을 설득했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기반을 확보했으며, 미래 산업의 전선에서 승리공식을 다시 쓰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가 함께 가라앉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수익을 통해 구성원 모두에게 가치를 환원하는 데 있다. 그것이 곧 시장이 받아들이는 승리공식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정의선 회장은 그 공식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선택이 ‘사업보국’이라 불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무게를 버티며 나아가는 모든 이들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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